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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카뮈: 이윤

굿바이 카뮈
2010년 가을, 하버드 대학에서 한 사내가 권총 자살한다. 자신의 자발적 죽음을 정당화하는 총 1,900여 장에 이르는 철학적 유서를 남긴 채. 이 유서의 제목은 ‘자살노트’였고, 모든 것은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서점을 돌아다니다 제목을 보자마자 집어들고 목차를 펼쳐보자마자 바로 구입했다. <굿바이 카뮈>라니, 얼마전에 쓴 내 독후감의 '시지프 안녕'과 비슷한 뉘앙스가 아닌가...! 반가웠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의 대표적인 철학 에세이. 간난신고 끝에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산정상에 올려놓으면, 바로 그 순간 반대 방향으로 바위가 굴러내려가고, 다시 그 바위를 정상을 향해 밀고 올라가는 끊임없는 헛수고의 연...책세상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공의 매혹 그 날도 분명히 잘 살고 있던 하루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세상 전체가

얇아서 부담도 없었고, 의견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는 기분이 나서 아주 재미있었다.

허무주의 그거 내가 다 해봤는데

작가는 서문에서 미첼 헤스먼이라는 사람을 대표적인 허무주의자라며 소개한다. 유명한 철학자도 아니었던 그는, 니체 등의 영향을 받고 35세의 나이에 '철학적 자살'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돈이나 사랑 같은 인생의 흔한 문제도 없었고 우울증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장강명 작가의 소설 <표백>의 인물 세영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기사도 있다.

1,905장의 유언서 남기고 하버드에서 총기자살
(보스톤=보스톤코리아) 장현아 인턴기자 = 하버드를 관광하던 관광객들이 보는 앞에서 한 청년이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경악케 했다. 올해 35세인 미첼…

이 책은 미첼 헤스먼 같은 소위 '허무주의자'들의 생각이 타당한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서,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중심으로 삶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는 그들(헤스먼, 카뮈)의 의견을 반박하는 책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첼 헤스먼과 카뮈를 비슷한 그룹으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단 카뮈는 실제로 자살하지 않았고(나보다 행복하게 살다 갔을 듯), 논리적 결론으로서의 자살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아니 단순히 '옹호하지 않았다' 수준이 아니다. <시지프 신화>의 핵심 질문이 뭘까? 바로 '부조리로부터 자살까지 과연 연역적으로 논증할 수 있을까?'이다. 그리고 카뮈의 답은 '아니오'다. 한마디로 <시지프 신화>를 썼을 당시의 카뮈는 미첼 헤스먼의 결론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뭐 어쨌든 그렇다고는 해도 카뮈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의 핵심 명제로부터 본인의 생각이 벗어나지 않도록 애를 썼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카뮈의 그 노력이 효과적이었는지와는 별개로), 작가 입장에서 카뮈를 일단 허무주의자로 분류한 것 같다.

일단 초반에는 카뮈의 접근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 시작한다. 이 때 공감했던 부분이 많았다. 특히 카뮈의 접근법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스타일리시하고 문학적이라는 말에서 현웃이 터졌다 ㅋㅋㅋ 물론 카뮈 스스로 <시지프 신화>는 에세이에 불과하다고 강조했지만, 초반에 그렇게나 논리(연역)를 강조한 것 치고는 뒤로 갈수록 낭만적, 영웅적 묘사가 많아진다는 느낌을 나만 받은 것은 아니었구나 했다. 또 태어나자마자 짝짓기를 하고 바로 죽어버리는 벌레의 삶과 인간의 삶이 크게 보면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는 말도 많이 공감했다. 어릴적에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던 때가 생각났다.

하지만 곧이어 (책에 목적에 맞게)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기나긴 반박이 시작된다 ㅋㅋㅋ 나는 여기서 작가의 반박 포인트를 뽑아서 내 의견과 함께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작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넣어놨는데, 카뮈의 논점과 상관없는 말도 많고 카뮈의 의견을 불필요하게 어리고 미성숙한 의견이라며 깎아내리는 부분도 많다. 솔직히 이런식의 태도(더 성숙한 단계가 존재하고 그 단계를 밟아 성장해야 한다 + 아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미성숙한 사람으로 취급)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일단 걷어내고 내가 보기에 핵심적인 논점만 뽑아 보았다.

무의미는 세계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바깥에서 바라보며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말

무의미는 결코 세계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다. 어떤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태를 내부의 시선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지금의 시점이 아니라 멋 훗날의 시점에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유한의 관점이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에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관점을 바꾸어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내부의 시선에서,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의 시선에서, 우주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무한의 관점이 아니라 유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의 노력과 그 결과물이 단지 소멸한다는 이유로 무의미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는 엄마 돼지가 자기를 빼고 새끼들을 세는 것과 비슷한 실수를 한 셈이다.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지성의 범주이듯이, 로크에게 (제1속성이 세계의 실제 속성인 반면) 제2속성이 인간의 감각 체계의 속성이듯이, 물리학에서 관측자의 관측 행동이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키듯이, 우리는 허무가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의식 주체가 세계를 바깥에서 바라보며 스스로 부여한 속성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p53-54

동의할 수 없다. '의미'란 말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 서사적이다. 세계는 '의미'를 동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에는 의미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의미가 세계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고 말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 우주의 의도를 밝혀야 한다. 인류는 아직 그걸 하지 못했다. 우주 어디에서도 어떤 절대자의 '의도' 혹은 '의지'를 읽을수 없다(찾지 못했다). 다만 인간이 그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한 서사를 작성할 뿐이다. 이렇듯 오직 인간만이 우주에서 의미를 찾거나 만들어낸다. 이를 두고 '인간이 인간 바깥을 바라봤기 때문에 무의미가 만들어졌다'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유한한 존재가 단지 '유한하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말

동의한다. 그동안 삶의 의미나 실존에 대해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카뮈를 포함한)이 '죽음'을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죽음을 극복한다고 해서, 영생이 가능하다고 해서 우주의 의도 없음이나 삶의 근거 없음이라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사는 인간은 그저 영원히 자기 삶의 의미를 궁금해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한 인생의 목적을 알아도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말

카뮈가 어느 날 문득 묻는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러자 신이 대답한다. "나는 사랑의 신이다. 너를 사랑해서 태어나게 했다. 너는 내가 부여한 성스러운 목적과 소명을 위해 사역하며 살기 위해 태어났다. 내 명령에 순종하며 선하게 살다가 다가올 최후의 심판을 통과한 뒤에 내가 건설한 천국에서 72명의 아리따운 여인들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카뮈는 "와~ 그렇군요. 저의 호소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답변을 주시니 부조리가 깔끔하게 해소되었습니다. 삶의 의미가 충만해집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답해야 한다. (중략) 실제로 카뮈가 원하는게 이런 그림일 것 같지는 않다. p7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개웃김 ㅋㅋㅋㅋ "와~ 그렇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절반 정도만 동의한다. 물론 어차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순종할지 반항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신의 뜻을 알든 말든 상황이 '연역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당위(윤리, 가치, 의미 등)'와 '의지'가 혼재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의지가 있으니 당위 따위는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걸까? 신의 뜻을 알게되면, 그것을 전부로서 살아가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삶의 지침 중 중요한 한가지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미에 대한 의문도 딱 그만큼만 해소될 것이다.

인간을 창조한 존재의 의도를 알아도 부조리가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

동의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걸 알면 부조리가 해소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런식의 가정 자체가 논점과는 관련 없다는 뜻이다. 작가의 주장을 의자를 예시로 들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날 의자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물어온다고 생각해보자.

  • 의자: 난 왜 태어났어?
  • 의자 공장 직원: 누군가 우리 공장에 발주를 넣어서 너를 만들었지.
  • 의자: 그 사람은 왜 나를 주문했는데?
  • 의자 공장 직원: 글쎄?
  • 의자: (아직 내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군)

이런 의자의 의문점에 대해, 공장 직원이 발주처의 직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발주처 직원이 자기에게 지시를 내린 상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런식으로 계속 설명을 이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상위의 존재를 추가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의자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그보다 더 상위의 존재와 그의 의도에 대한 가정적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비슷하게 인간을 창조한 신의 존재와 의도를 알아차리는 순간, '신 존재 바깥(신을 만든 신)의 존재와 의도'에 대한, 또다른 해소할 수 없는 궁금증이 생겨버리게된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과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뮈가 집중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카뮈가 말한 '세계의 침묵'이 겨우 '인간을 만든 바로 상위 존재(예시에서는 의자 공장 직원)에 대한 무지'만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무한하게 이어질 수 있는 존재와 의미에 대한 질문의 사슬, 아무리 파헤쳐도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앎에 대한 열망, 이 전체가 카뮈 부조리의 핵심 요소 안으로 포섭된다. 관점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고 해서 부조리의 논리 구조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카뮈의 '반항'은 허술한 논리에 바탕을 둔 낭만주의에 불과하다는 토머스 네이글의 비판

완전히 동의한다. 내 독후감에서도 말했지만, 카뮈의 부조리라는 문제의식에 비해 반항이라는 솔루션은 쓸데없이 영웅적, 낭만적이다.

만일 영원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부조리라는 현상 자체도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p82

옳은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식의 문제는 카뮈 뿐 아니라 '가치의 해체'를 시도하는 모든 사상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본인이 기존의 모든 가치 체계를 부수면서 스스로가 믿는 가치를 설명한 논리까지도 부숴버린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질문은 단 하나, 바로 자살이다.라는 카뮈의 말은, 부조리의 존재가 사실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려면 인간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긍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인간적 의미'야 말로 카뮈가 속임수라며 부정하려는 개념이고, 따라서 이는 카뮈 입장에서 모순이 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작가가 말하는 '카뮈의 반항 보다는 토마스 네이글의 아이러니가 더 적절한 태도'라고 말하는 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게 왜 바람직해? 왜 부조리를 성찰하고 일상으로 돌아와야 해? 단순히 '아이러니라는 태도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당위인 것처럼,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카뮈가 했던 '오직 반항만이 바람직한 태도'라는 말 만큼이나 근거가 부족하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우주적 관점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는 말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부적절하게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는 우주적 관점에서의 판단을 일상생활에 마구 적용한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애인이 사랑하냐고 물었는데 그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대답하고, 아랍인을 죽였는데 그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자신이 살인죄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냐고 반문한다. p85

동의한다. 점점 더 핵심으로 들어가고 있다. 계속 말하지만 카뮈의 부조리 개념은 '침묵하는 세계(우주적 관점에서의 무의미)와 열망하는 인간(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 사이의 어긋남'이다. 즉 세계와 인간의 관점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두 세계는 독립적이고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다른 계(system)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의미가 우주적 무의미 앞에서는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도 마찬가지어야 하는데, 뫼르소는 우주적 관점을 인간의 세계로 들이려 했다. 이는 모순이다.

데이비드 흄이 인간의 목적에 대한 고민으로 괴로울 때 '평범한 일상과 업무'로 고통을 극복한 것이 카뮈보다 현명한 처사라는 말

동의하지 않는다. 바로 위에 했던 말과 같은 말이다. 두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명확한 상황에서 '일상을 통한 존재 고민 극복'은 마취제에 불과하다. 물론 그게 마취제든 뭐든 실용적인 측면에서 고통을 경감 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고,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을 '극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뫼르소가 우주적 관점을 일상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 모순인 만큼, 일상적 행동으로 존재에 대한 고민을 극복하겠다는 시도 역시 모순이다.

사실 의미 있는데 몰랐지

작가는 이렇게 길게 허무주의를 부정한 다음, 본인이 생각하는 의미의 기준 세가지를 제시한다.

  • 객관적 가치를 통한 주관적 만족
  • 변화와 성장 (자기완성)
  • 공동체와 사랑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기준들이다. 다만 내 생각에는 저 기준들 전부 마지막 기준인 공동체 혹은 사랑으로 환원할 수 있어 보인다. 위에서 말했듯 객관적 가치는 우주의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반드시 인간적 관점, 특히 그 중에서도 사회(공동체)를 전제해야 한다. 변화와 성장이라는 개념 역시 그 변화를 인정해줄 타인과, 특정 방향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정의하고 가치를 매겨줄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나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 정한 목표대로 성장하겠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정한 목표가 정말로 내가 정한 목표일까? 애초에 공동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 목표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과연 그 어떤 타인의 인정도 전혀 받지 못하는 결과를 스스로 목표로 삼을 수 있을까? 즉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치', '의미'란 인간끼리의 공동체, 사회 안에서만 성립 가능한 개념이라는 말이다.

어쨌거나 내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왜 작가가 이런 기준을 선택했는지 그 근거를 설명하는 과정은 별로 매끄럽지 못해 보인다. 저 기준들이 왜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논거를 쌓아올리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대중적으로 먹힐만한 감수성을 던지면서 독자의 직관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미 작가 본인의 가치 체계(애초에 대중적으로 인정될 만한 인생의 의미들)를 전제로서 숨겨두고, 그 보이지 않는 전제로부터 근거를 가져오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을 보자.

불행해지더라도 환상에서 깨어나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진실을 모른 채 행복하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가? 주관적 만족만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에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이 단지 '행복과 즐거움으로 채워질 빈 그릇'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닐까? p94
어떤 변화나 새로움, 성장 없이도 단지 본능이 충족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테일러의 시지프스는 '뇌 손상에 따라 자발성을 잃은' 환자의 사례와 다를 바 없다. 이것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일까? p101
도전적인 목표를 단념하고 단순히 가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는 행복을 추가하는 것은 단지 '게으름벵이의 평온'일 뿐이다. p111

'빈 그릇이라고 평가절하', '환자의 사례', '게으름벵이 평온' 같은 말은 반드시 애초부터 특정한 가치 체계를 전제했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다. 한마디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을 다시 근거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순환논증이다.

하지만 작가가 순환논증을 사용했다는 것과 별개로, 위에서 말했듯 나는 작가가 제시한 기준들에 동의한다. 나는 저것들이 인생의 의미가 맞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는... '인생 속 의미'가 맞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의미와 인생 속 의미라는 두 세계

바로 위에서 작가가 순환논증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엔 가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모든 논증이 순환논증일 수 밖에 없다. 사회적 가치는 사회가 인정(합의)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 되었다. 왜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로 합의했을까? 그게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거나, 인간적 감수성을 요동시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위에서는 '인간의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가치란 우주와의 연역적 연결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 안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인생 속 의미다)는 뜻이다. 조금 짜증나는 점은 작가 본인도 다 알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자취들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점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죽음뒤에 이어지는 자취들이 어떻게 개인적 수준과 객관적 수준의 중요성을 넘어서 '본질적으로, 내재적으로, 그 자체로' 중요할 수 있단 말인가? (중략) 일부 철학자들이 '인생 속 의미'는 찾을 수 있지만 '인생의 의미' 자체는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허무주의자로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 본질적, 내재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p154

의미가 언제나 인생 속 의미일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의미'라는 단어의 뜻 자체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랑, 유대, 제휴, 헌신, 신앙 등을 통해 자녀, 친구, 타인, 대의명분, 신과 같은 외부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기의 범위를 확장하려 한다. 인생의 주요 의미로 꼽히는 것들은 모두 나의 존재를 넘어선 세계와의 '관계 맺기'라는 형태를 띈다. p159

의미가 곧 관계라는 말은 완전 동의가 잘 된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의미를 정의한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의미와 인생 속 의미라는 분절된 두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가 한계를 초월하여 더 큰 가치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 거기서 만족하고 머무를 수도 있지만, 다시 그것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중략) "우리가 아무리 넓게 연결되고, 아무리 의미의 그물망이 확장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둘러싸는 경계선을 상상 속에서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경계선 밖에서 그것의 전모를 바라보며 물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이것은 결국 의미의 문제가 계속해서 자기초월을 하다가 더 이상의 한계가 없는, 심지어 상상 속에서조차 더 이상 그것의 바깥에 설 수 없는 무한에 도달할 때에만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래서 의미를 계속 추구하는 사람은 무한한 성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p169
우리는 의미의 의미를 자신의 외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이해한 바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바깥이 없는 무한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의미를 물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때, 의미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소멸하게 된다. p170
무한에 도달한 자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이 없을뿐더러 질문조차 성립할 수 없다. p171

작가는 이 지점에서 '무한'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불필요하다고 느낀다. 어차피 인간은 인간 바깥과 관계할 수 없는데, 우주가 무한하든 그렇지 않든 무슨 상관일까? 그래서 무한 개념은 일단 빼두고 작가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우리가 말하는 의미란 언제나 '인생 속 의미'로 나와 외부와의 관계로서 존재한다는 것, 또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생의 의미'란 애초에 관계할 외부가 없으므로 질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결론

하지만 책을 읽은 후의 내 생각이 책을 읽기 전의 내 생각과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지만 내 눈에는 카뮈의 부조리의 도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주의 관점에서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말도 일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 우리는 왜 자꾸만 우주적 진리를 인간 안으로 포섭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는 걸까? 그냥 내가 미친놈이라서 그런가? 인간은 인간 세계 안에서의 의미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무대장치가 붕괴되는 경험은 그냥 (없어져야할)가끔 찾아오는 신경증이나 발작 정도로 해석해야 하는걸까? 또 인간의 우주적 관점에서의 질문을 더 이상 던지지 않는다면, 철학은 무슨 쓸모가 있는걸까?(쓸모 없다고 하면 할말 없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진짜 쓸모 없는거 같기도 하고 ㅋㅋㅋ) 비슷한 논리로 철학을 끝내겠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야심찬 선언 이후에도 철학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뭘 하고 있는걸까?

지금까지의 결론으로 보아 나는 여전히 인생 속 의미 안에서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번에 이 책과 작가라는 관계를 하나 더 맺은거라면 하여튼 잘 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읽는 것도 즐거웠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즐거웠다(그러니까 이렇게 길어지지) 나도 이제는 '삶의 의미 찾기' 같은 질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생각해본게 그거 뿐이라 그런지 자꾸만 제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ㅋㅋㅋㅋㅋ

ps

재미있는 것은 실존주의자들처럼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과장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거의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p128-129
인생의 의미라는 문제를 깨닫는 단계 이르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통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한 정신적 성취임에는 분명하다. (중략) 그런데 이러한 상승에 도취되에 인생의 의미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의 이미를 전혀 고민하지 않는 것 못지 않게, 의미에 너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는 아닐까? p130

ㅋㅋㅋㅋ 맞는 말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 와중에도 '바람직함' 찾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