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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양갱을 읽고

가사

떠나는 길에 네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잠깐이라도 널 안 바라보면

머리에 불이 나버린다니까

나는 흐르려는 눈물을 참고

하려던 얘길 어렵게 누르고

그래, 미안해라는 한 마디로

너랑 나눈 날들 마무리했었지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이야

떠나는 길에 네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이야

상다리가 부러지고

둘이서 먹다 하나가 쓰러져버려도

나라는 사람을 몰랐던 넌

떠나가다가 돌아서서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꾸 생각이 이런식으로 흐른다.

  • 너는 왜 나에게 ‘너무 많이 바란다’고 했을까? (무엇을 두고 너무, 많이 라는 말을 쓴 것일까?)
  • 내가 실제로 바라던 것은 무엇일까? (밤양갱은 무엇일까?)
  • 만약 내가 바라던게 뭔지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왜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이야기를 눌렀을까? (왜 미안하다는 말로 그냥 갈무리하려 했을까?)
  • 왜 너는 나를 모른다고 했을까? (그럼 누가 어떤 방법을 쓰면 나를 알 수 있게 되는걸까? 만약에 그 방법을 알고 있다면 왜 너에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걸까?)

ㅋㅋㅋ…

이런식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이 가능할수도, 사실상 불가능할수도 있고, 어쩌면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불가를 떠나, 이런 질문을 시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어떤 태도에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차이를 다른 말로 바꿔보자면, 베일 너머를 들추려는 사람과 그대로 두려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베일 너머를 들추고 싶은 마음은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는 신화가 들어서기 어렵다. 신화란 들춰진 베일 뒤에 또 다른 베일을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베일로는 당연하게도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다. 베일을 그대로 두려는 사람들을 그 욕망만큼 낭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덮인 베일을 들추지 않음으로서 마음속에 항상 신화를 간직한다. 누가 강제로라도 눈 앞에 베일을 들춰버린다면, 그 즉시 다른 신화(새 베일)를 가져와 덮는다.

그래서 이 두 그룹은 본래적으로 서로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각자의 욕망이 상대방의 욕망을 훼방놓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호기심맨들의 무지성 돌격을 신화의 수호자들로만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우리에게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지식들이 너무 많이 축적되어버렸다. 인간을 둘러싼 베일이 점점 더 많이 들춰지고, 낭만주의자들이 패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언젠가 최종적 베일을 마침내 벗기게 된다면 그것 뒤에, 신화를 쫓아낸 자리에는 무엇이 있게 될까? 그거야 들춰봐야 아는거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내 머리에 떠오르는 건 ‘더 검게 팽창하는 우주’, ‘끝없는 공간’, ‘광활한 무’ 같은 단어들 뿐이다. 베일을 벗겨낼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하찮음 뿐이다.

아름다움은 오직 은폐로부터만 탄생한다. 파헤치지 않아야 서사가 된다. 사건을 분석하지 않을 때만 이 모두를 뭉게어 시로서 간직할 수 있다. 밤양갱을 외치는 누군가에게, 같은 인간된 도리로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밤양갱을 그저 밤양갱으로 두어주는 것이다. 낭만주의자가 손에 쥐고 있는 밤양갱을 빼앗고, 포장지를 뜯고, 사실 그 안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내가 앞으로 그럴 수 있을까? ‘니가 말하는 밤양갱이 도대체 뭐냐’고 묻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현상을 탐구하고 분석하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믿지 못하겠다…

ps 비비의 표정 연기는 귀엽지만 어딘가 애처로워 보여서 좋다.